2017 성가대 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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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산교회 남전도회 천태산 산행 201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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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댄동산 ELBiS 누가복음 4장 요약

ELBiS/Luke 2012. 9. 15. 01:00

물댄동산 ELBiS 누가복음 4장 요약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동안 ‘성령’에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 그 마지막 날에 받으신 시험은 그 종합판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그가 시험을 받으셨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을 만큼 철저하게 인간이 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는 주리셨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구가 있었으며 목숨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조차 흔들릴 수 있는 분이셨다. 그는 그냥 지상에 내려온 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온 그는 죄인들이나 받는 세례를 받았고 더구나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하시므로 우리도 예수님 처럼 본능과 성공, 권력,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는 소망이 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시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그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그 복음을 오해하고 병 고치는 기적만을 기대한다.(v23)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고대하던 복음은 지나갔다. 이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이야기는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하는 이야기(오늘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지만 너희는 아니다!!)를 하고 그들의 배척을 받게 된다.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을 자칫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치는 것에 중점을 두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귀신은 은근히 예수님이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부추긴다.(vv33-35, vv40-41)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그들의 병을 낫게 하시지만 그것이 그의 중심 사역이 아니다. 그의 축사와 병고침의 사역은 소문을 타고 온 갈릴리에 퍼졌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도 그런 기적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온 갈릴리 병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기적 안에 살고 있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적인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귀신에 들리거나 병들었을 때이다. 우리가 귀신에 들리지 않고 병들이 않고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다. 부러 기적이 필요한 고난을 당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일상에서 평범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일부러 먼나라까지 가서 쥐엄열매나 얻어먹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 김철규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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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댄동산 ELBiS 누가복음 3장 요약

ELBiS/Luke 2012. 6. 30. 01:00

물댄동산 ELBiS 누가복음 3장 요약

 

누가복음 3장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즈음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서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0-14절에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았고, 세리는 동족에게서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착복하였고, 군인들은 자신의 급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건을 강탈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거짓으로 고발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분봉왕인 헤롯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부도덕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죄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치 올 진노'를 피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러 온다. 요한은 이런 몰염치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쌍욕을 해댄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님이 등장하신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유대에서 신발끈을 풀어주는 사람은 가장 낮은 하인이 하는 일이다. 요한도 예수님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물이 아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며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은 왜 스스로 이 침례의 자리에 나왔는가? 침례는 죄있는 자가 임박한 진노(도끼가 이미 뿌리에 놓였다)를 피하기 위해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왜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욕을 듣는 자들과 같이 그 세례의 대열에 참여하였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철저하게 한 인간으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이 땅의 사람들의 삶에 철저하게 동참하고 계신다. 그는 억울하지만 담담히 그의 사역의 첫걸음을 침례라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시작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소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의 다른 모습인 침례를 받아들이셨고 또한 죄사함을 얻는 것에 동참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림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고 부활하신다.

 

이런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 하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응답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은 때로 감당하기 힘들고 때론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일에는 합당한 하늘의 응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역은 무모한 자학이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자발적 순종이다. 나를 부르신 이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되며 그의 위로와 환영으로 마무리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희생만이 의미있다. 

 

예수님은 오늘 세례의 현장에서 그 사역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하나님 됨을 버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의 삶을 인정하고 그 삶을 시작하신다.

 

- 김철규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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